먼저, 영화 보지도 않고 무조건 제목 지은 사람 지옥의 센스를 가졌다고 까댄거 미안함. 영화 보고 나서 생각해보니, 어떤 관점에서 보면 제법 그럴싸하기도 하다. 나름대로 생각 많이 하고 지었을 듯. 이 영화의 감독이 우디 앨런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심하게 까이지는 않았을 듯 하다. 그래도 할말은 해야지... 솔직히 알고 보건 아니건 우리나라 제목이 세련되지는 않다. -_-
스칼렛 요한슨을 추앙하게 된 계기는 동일 감독의 「매치 포인트」라는 영화 때문이었다. 이 영화에서 스칼렛 요한슨은 청순하지만 우울한 순수함을 지닌, 신경질적으로 비극으로 돌진하는 여인 역을 자연스럽게 소화했다. 나는 지금도 스칼렛 요한슨의 이미지를 이 영화에서의 첫 등장 장면인 테니스 코트에서의 하얀색 원피스 차림으로 기억한다. 「매치 포인트」를 아주 재미있게 보았던 터라, 감독에 배우까지 동일한 이 영화를 기대했다. 「매치 포인트」에서의 씁쓸하고 극적인 상상력에 '홍상수 영화의 극단'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는데, 그 느낌이란게 결코 매끄럽거나 상쾌하지는 않다. 하지만 때로 사람들은 개운하지 않은 뒷맛을 자처하여 느끼고 싶어하게 마련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속에 쌓였던 '어떤 종류의 체념'을 자포자기의 느낌으로 확인하고 싶을때 그런 종류의 컨텐츠를 찾아다닌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언제 보게 되었든 필연이었으리라.
일단은 여배우 이야기. 난 이 영화에서 또 한 번 스칼렛 요한슨의 도발적인 매력을 느끼리라 예상했었다. 그런데 의외로 이 영화에서 숭배의 대상이 된 것은 스칼렛 요한슨이 아니었다. 페넬로페 크루즈! 마리아 엘레나! 도저히 이 배우 외에 마리아 엘레나 역에 적역인 배우를 떠올릴 수도 없다. 이 영화로 그녀는 영국/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는데, 그건 너무나 당연한 평가이다. 후반 40분밖에 나오지 않지만, 세명의 주인공을 압도하는 존재감을 뿜어낸다.
마리아 엘레나는 뛰어난 재능과 미모를 가지고 있고 불행히도 스스로가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너무 비범한 예술적 재능과 지나치게 섬세한 감성을 지닌 탓에 필연적으로 파괴적인 히스테릭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영화에서 표현되는 바와 같이, 그런식으로 예술 혹은 후안 안토니오를 통해 분출되지 않았다면 그녀는 진작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을테다. 네명의 주인공 중에 가장 감정적으로 공감이 가는 캐릭터는 마리아 엘레나였다. 그녀의 우울함, 분노, 사랑 같은 감정들이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 중 가장 현실적-영화적인 극단성을 감안하고-이지 않았나 싶다. 그만큼 강렬하기도 하고 편치 않기도 한 인물 유형이지만, 내가 크리스티나 였으면 후안 안토니오가 아니라 마리아 엘레나를 사랑했을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사실 가장 불행한 캐릭터 역시 마리아 엘레나이다. 그녀는 평생 그 수렁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테고, 후안 안토니오와는 영원히 멀어질수도, 영원히 가까워질수도 없을것이다. 마치 같은 방향으로 무한히 뻗어나가는 평행선같이, 절대로 가까워질수 없으면서도 멀어질수도 없는 최악의 관계이다. 영화에서 마리아 엘레나가 처음 등장했을 때, 후안 안토니오에게 "왜 이렇게 되었지?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같은 말을 한다. 이런 내용은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간간히 등장한다. 나는, 그야말로 그녀에게 연민을 가득 담아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정말 가여웠다.
감정적으로 공감이 안가던 부분은 '뭔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로맨틱한거야. 그게 사랑의 완성이야' 라는 요지의 이야기를 하던 부분이다. 충족되지 않은 바로 그 salt (후안 안토니오가 마리아 엘레나의 체류의 당위성을 역설할 때 꺼낸 '필수요소'중 마지막이 salt 라는 것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 역할을 하는 것이 크리스티나 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완성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완전한 사랑'이라는게 자기 꼬리를 따라 도는 개와 그의 그림자 같은 관계라니, 너무 절망적이지 않은가. 사람은 언제나 감정에 따라 움직이고 사상도 생각도 그에 따라 바뀌니, 그 시절의 마리아 엘레나라면 저런 말을 했을수도 있다, 라고 생각한다.
마리아 엘레나에 너무 몰입해서 정작 다른 부분에서 느낀 생각들을 정리할 여유가 없네. 음, 사실 비키의 스토리는 별로 관심이 없다. 장담하건대, 이 세상 사람의 90%, 아니 95% 이상은, 이상을 떠나 현실적으로 비키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할 수 있을 것이다. 난 후안 안토니오 같은 사람은 만나보질 못했지만 글쎄 나라면 어땠을까, 생각하면 쉽게 답이 안나온다. (그 전에 더그 같은 스타일과 결혼을 생각지도 않았겠지만... -_) 후안 안토니오는 비키와 크리스티나, 마리아 엘레나를 부각시켜주기 위한 장치였다고 생각한다. 일단 다른 것을 다 떠나서 내가 매력을 느낄만한 타입이 아니라 몰입이 조금 힘들었다.. 정도... 크리스티나는, 음, 크리스티나는.
다시 스칼렛 요한슨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녀의 이미지는 전성기 마릴린 먼로를 보는듯한 육감적인 몸매에 백치미 같은 매력이 넘치는 전형적인 서구형 미인의 2000 년대 버전이다. 그런데 사실 그녀가 등장한 영화 중 (내가 본것만 따졌을 때) 「매치포인트」 를 제외하고, 「판타스틱 소녀백서」, 「천일의 스캔들」 그리고 최근에 본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같은 경우 그녀의 섹시함이나 관능미가 전면에 부각된 영화는 하나도 없다. 그런 이미지는 아마도 Vogue 누드 촬영(이거 정말 죽여줬는데!)이나, 관능적인 화보 - 및 국내에서의 영화 개봉때마다 자행되는 황색언론홍보 - 를 통해 형성된 면이 많고, 영화에서는 언제나 역할에 충실한 좋은 배우였다. 오히려 이 배우의 저런 이미지 때문에 '의외의 캐스팅' 이라는 생각이 드는 영화에서 오히려 '이 배우가 아니었으면 누가 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떤 상황이든 극과 역할에 당위성을 부여할 수 있는 배우가 훌륭한 배우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스칼렛 요한슨은 21세기 재림한 마릴린 먼로의 외모에 재능까지 겸비한 좋은 배우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에서도 역시 몽상가적 기질이 있는 '소녀'같은 역할에 적역으로 잘 어울렸다. 내가 마리아 엘레나에 깊이 공감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는 크리스티나와 좀 더 비슷한 점이 많다. 이를테면- 표현하고 싶은 것은 넘치는데 그럴만한 재능은 없고, 예술을 동경하긴 하지만 이해하고 즐길 깜냥은 되지 않고,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을 두려워하지는 않지만 결국은 숙명적으로 고독해하고 (전문용어로 '허세기질이 있다'고도 하지...-_), 등등. 그러나 그녀와 나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그녀는 깊은 마음의 의문에 -의도했든 아니든- 답하려 노력하는 구도자 스타일이라 안정적인 트라이앵글의 관계를 기어이 끝내버렸고(이 지점에서, 마리아 엘레나와 후안 안토니오는 가장 현실적이고 비극적인 인물이 된다.), 나는 순간순간 떠오르는 극단적인 감정들에 그대로 온 정신을 쏟아버리는 마리아 엘레나 같은 스타일이라는 점이다. 어쨌든간에 마리아 엘레나나 크리스티나나 허공에 열정을 쏟아버린다는 점에서 트레직한 캐릭터이긴 마찬가지다.
영화를 보는 방식은 다양한데, 나는 캐릭터를 통해 관계를 파악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 영화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간의 관계가 나오는데, 그 캐릭터들을 통해 보면 모두가 너무나 필연적이고 타당하다. 한발 물러나서 관조하는 입장으로 보면 정상적인 관계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고 재미있는 점이다. 모두가 normal 이지만, 인간이 행복을 지향하는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면 또한 모두가 abnormal 이다. 비극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그것과 유사한 느낌에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면 결국은 씁쓸한 여운이 남게 된다. 나의 워너비는 아무도 아니지만, 모두에게서(심지어 후안 안토니오를 포함해서!) 현재의 나를 발견할 수 있는 흥미로운, 좋은 영화였다.
안녕하세용(_ _) 지나가던 괴소녀입니다.
답글삭제저는 원래 페넬로페 크루즈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는데요(아마 톰크루즈 때문인것 같아요;)
영화 <나인>을 보고 급 호감으로 돌아섰답니다. <나인>은 전체적으로는 망한 영화지만 출연한 여배우들이 들려주면서 보여주는 노래 퍼포먼스는 정말 짱이여요-_-b
전 재밌게 듣고 즐겼는데, 호불호가 많이 갈려서 영화 자체는 추천하기가 무섭네요;ㅅ;
@차가운새벽 - 2010/04/13 18:25
답글삭제오, 괴소녀님, 방가방가~ ^ㅂ^
우햑! <나인>! 내용 레알 구려도 상관없는 그 천국의 캐스팅의 영화 아닙니까! 아, 이거 본다본다 하고 못봤네... 꼭 보겠어요~ <귀향> 도 보고 싶더라구요.
난 매치포인트에서! 그...비오는 날 키 큰 풀밭에서...
답글삭제분노의 ㅇㅇ장면에서 스칼렛 요한슨을 잊을 수가 없다.
@한괴미 - 2010/04/14 11:20
답글삭제아 그 장면도 기억난다. 그리고 그것도 기억나.
'내겐 너무 비싼 그녀'를 보고 잠못이루던 너. ㅋㅋㅋㅋ
요즘 종종 재미난 영화를 보는데 그럼에도 딱 나다 싶을만큼 공감가는 인물이 별로 없더라. 모두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돼. 스칼렛 요한슨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봤는데 거기서도 육감적인 역할은 아니었어. 임산부에 외로운 여자였지. 그런데 그 모습도 잘 어울리더라. 영화 자체가 괜찮았음.
답글삭제@베배 - 2010/04/16 10:24
답글삭제자기는 저편에 두고 극중 인물에 몰입해서 볼 수가 없다는 건가? 이 영화 봤는지 모르겠는데 추천한다네. 모두의 개성이 넘쳐서 모두에게 공감이 가더라고.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도 번역된 제목이 엄청나다는 이유로 한 때 큰 이슈가 되었던걸로 기억 ^^
trackback from: BYSIM [관심 블러거 시리즈 3]
답글삭제시네마 천국(교향단 연주)OST입니다. 클릭하세요 그럼 기분이 좋아집니다. byism님의 블러그를 소개합니다. http://byism.net/ 관심 블러거 시리즈를 연재할까 말까 가끔 고민도 합니다. 대부분 블러그가 공개성이지만 개인성을 지향을 하는 분도 있어서 말입니다. 아직 까지 연재된 분들이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 다는 판단에 진행합니다.(이 시리즈 연재를 기다리는 분이 있을까? 의심반 기대반이지만 말입니다.) 그나마 연재를 응원?해주는 스텔라님..